매월 아르케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젠다워커를 소개합니다.
아젠다워커는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고민을 갖고 있는지,

또 아르케에서는 어떤 경험을 하고 있는지 나눕니다.

아르케 멤버이자 『어쩌다 유교걸』, 『함께 살 수 있을까』를 쓴 작가이자 인터뷰어인
고은(@goeunk1m)이 아르케 멤버들을 인터뷰합니다. 

다양한 영역에서 사회 변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는 아젠다워커의 이야기가 궁금한가요?
월간 아젠다워커는 매월 넷째 주 금요일 아침 9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아젠다워커 유랑의 아젠다는 ‘#퀴어 #에코페미니즘 #청소년 #팬덤’ 이다. 지방에서 대학교를 나왔고, 산골에 있는 비인가 대안학교에서 9년 동안 교사로 지냈다. 퇴사 후에는 성소수자 당사자였던 자신의 교사 경험을 책 <별별 교사들>(2023, 교육공동체벗)에 싣기도 했다.

이제 막 수도권으로 올라온 그에게 아르케는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다. ‘도시의 1인 청년 가구’로 실존의 위협을 느끼는 그는 엄청난 활동력으로 아르케에서 열리는 많은 클럽에 참가하고 있다. 그 덕에 2023년 유랑은 아르케에서 온몸이 따뜻해지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엉엉 울며 일기를 쓰는 시간을 맞이하기도 했다.

유랑과 비건 옵션이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집중하며 말할 때 왼손으로 왼쪽 볼살을 만지작거렸다. 볼살 부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의 부드러워 보이는 볼살을 나도 만져보고 싶다고, 인터뷰하는 내내 생각했다.

마음을 온몸으로 느끼는 시간

고은  처음 아르케에 들어오셨을 때 어떠셨어요?

유랑  제가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은 다 학교 관련된 사람이었어요. 다양한 활동가가 모일 테니 재밌겠다, 해서 신청했죠. 아르케 첫 시즌이 시작됐을 때가 퇴사한 첫 달이었어요. 저에게도 퇴사한 뒤의 첫 시즌이었죠. 너무 신났어요. (웃음)

그래서인지 활동을 열심히 안 하다가, 웰컴데이에서 아르케 멤버들을 만났어요. 소개하며 각자의 아젠다를 말했는데요. 평소에는 교육이나 퀴어 페미니즘 이야기를 주로 하는데, 그날따라 유독 케이팝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그때 한참 덕질 때문에 고민하던 때였어요. 페미니스트로서 덕질을 계속하는 게 맞나, 싶었거든요.

아르케 운영 멤버인 시시가 자기도 덕질하고 있다고, 같이 얘기 나누고 싶다고 해서 클럽 <페미니스트의 건강한 덕질 라이프>를 열게 됐어요. 그러면서 아르케가 저에게 조금 더 의미 있는 곳이 된 것 같아요.

고은  페미니스트 라이프와 덕질 라이프가 부딪히는 부분이 있나요? 제가 덕질을 안 해봐서 잘 몰라요.

유랑  케이팝 덕질을 하다 보면 내 인권과 아이돌의 인권이 무너지는 순간을 계속 맞이해요. 근데 덕질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잖아요. 덕질이 저에게는 너무 큰 의미거든요. 힘든 순간에 저를 살게 만드니까요.

케이팝 안에 큰 이슈들이 있는데, 덕질 하면서 그런 문제를 직면하기가 쉽지 않아요. 내가 자리하고 있는 시공간을 알게 되면 불편해지기도 하고, 아이돌을 보는 게 우선순위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저런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없었어요.

얘기할 데도 없으니까 괴리감도 생기고 갈증도 있었어요. 그런데 이걸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게 제게는 의미가 컸던 것 같아요. 우리의 활동이 페미니즘과 부딪히는 지점도 살펴보고, 각자가 고민하고 있었던 지점을 드러낼 수 있어서 좋았어요. 클럽 멤버들은 제 덕질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사람들이에요.

고은  마지막 시간에 유랑이 클럽 멤버들을 위해 작은 선물을 준비한 걸 봤어요.

유랑  사실 클럽을 열 때 무섭기도 했거든요. 케이팝 아이돌 산업 안에 예민한 지점이 되게 많아요. 논쟁거리가 될 수 있는 주제들로 대화를 하려니까 무섭더라고요. 내 생각이 상대의 덕질을 공격하거나 상처 주는 말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클럽을 열어보니 내 생각이 상대를 향한 공격이 되지 않았어요. 오히려 우리의 고민이 되더라고요. 우리의 고민을 어떻게 사회나 아이돌 산업과 연결시키지, 하는 상상도 함께 해줬어요. 너무 재밌고 고마웠어요.

저는 멤버들이 다들 행복했으면, 행복하게 덕질을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그 마음을 전하고 싶었죠. 마지막 시간에는 서로 마음을 나누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어요.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따뜻함을 전하는 모임을 만들 수 있구나, 정말 놀라웠어요.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추후 모임을 하려고요. 트위터 계정을 파서 이슈가 있을 때 성명을 낼 수도 있고, 생각을 나눌 수도 있겠죠. 다들 이런 모임이 계속 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나중에는 각자 응원봉 들고 상암에서 집회를 하면 좋겠다는 얘기도 했어요. (웃음)

유랑에게 용기를 주는 이들

고은  유랑 님이 참여하신 책 <별별 교사들> 잘 읽었어요. 사회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교사들의 목소리가 잘 담겨있는 것 같아요.

유랑  사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조금 무서웠어요. 제가 커밍아웃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학교에서도 제가 커밍아웃을 한 사람이 별로 없어요. 학교를 그만뒀지만, 친한 양육자분들이 있어서 계속 만나고 있거든요. 그래서 책이 나오는 시점에 홍보를 할지 말지 고민했어요. 그러다가 지금 이걸 하지 않으면 평생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고은  글 쓰는 과정은 어떠셨어요?

유랑  어렸을 때는 글 쓰는 걸 너무 좋아했는데, 학생이 되고 글로 평가를 받으니까 싫어지더라고요. 한동안 글을 안 썼는데요. <별별 교사들>에는 그냥 제 삶에 관해 썼잖아요. 내 삶이 누군가에게 용기를 주거나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게 좋더라고요. 그냥 흘러갔던 시간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도 됐어요. 그 뒤로 글 쓰기에 재미가 들려서 조금이라도 좋은 일이 있으면 계속 기록하려 하고 있어요. (웃음)

고은  어떤 것들을 돌아보게 되셨나요?

유랑  처음에 글을 쓸 때는 대안학교에서 지워지는 존재들에 대해 쓰고 싶었어요. 그런데 북토크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경험도 엄청 좋더라고요.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아직 너희를 찾아가는 과정이니 혼란스러울 수 있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그런데 한 독자분께서 교사였던 저의 커밍아웃이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청소년기의 일시적 혼란으로 단정짓지 못하게 하는 방파제가 된다”고 해주셨어요. 앞으로 뭘 더 하면 좋을지 정리가 되더라고요.

고은  제가 진행했던 인터뷰 클럽에서 실제로 인터뷰 하실 때, 예전에 학교에서 함께 활동했던 학생들 이야기를 담으셨던 게 기억나요. 책에 그 활동 이야기가 많더라고요.

유랑  네, 저희 모임 이름이 짱똘인데요. 제가 학교 교사회에 커밍아웃하면서 불안했거든요. 그런데 짱똘과는 그런 감정을 나누고 차별받은 경험을 공감할 수 있었어요. 먼저 앞장섰던 친구 덕에 용기를 낼 수 있었죠.

같이 뭔가 하고 싶은데, 저도 퇴사하고 친구들도 졸업해서 시작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클럽에서 인터뷰하면서 짱똘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동안 우리가 학교 얘기만 했었구나, 우리 이야기는 안 했었구나.

그래서 이제 저희 글 써요! 목차도 짰고요. 다들 의욕이 넘쳐서 너무 재밌어요. 성소수자 당사자로서 학교 안에서 겪었던 불편함과 구조적인 문제를 짚고, 또 청소년으로서의 경험을 이야기하려고요. 덕분에 용기를 냈어요.

고은  잘됐다! 시발점이 됐다니 기쁘네요.

유랑  저는 의심이 많은 편이라 간을 계속 보거든요. 우리의 이야기나 활동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정말 의미 있는 일일까 궁금했어요. 학교나 공동체를 공격하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도 걱정했는데요. 다들 각자 경험했던 공동체나 학교 이야기를 해주셨잖아요. 드러나지 않았던 목소리라 꼭 필요하다고요. 클럽에서 용기를 얻었어요. 좋은 의미로 많이 깨졌죠. 인터뷰 발표한 날 울기도 많이 울었고요. 오랜만에 그날을 다 기록해 뒀어요. 작년 저의 터닝 포인트였던 것 같아요.

도시에서의 새로운 연결

고은  아르케에 모이는 사람을 아젠다워커라고 부르잖아요. 유랑 님은 스스로 아젠다 워커라고 생각하세요?

유랑  네, 그런 것 같아요. 처음에는 용어가 낯설긴 했어요. 그런데 와보니 멤버들의 아젠다가 다양하고, 그에 맞게 클럽이 열리는 게 너무 재밌더라고요. 적절하게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서 안전하게 얘기할 수 있지만, 동시에 다양한 분들이 계셔서 제게 아직 편견과 고정관념이 많다는 걸 깨닫고 있어요.

책을 읽거나 글을 같이 쓰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재밌는 것 같아요. 다양한 분야에 계신 분들이 모여있으니까, 같은 걸 보고도 다양한 생각을 들을 수 있어요.

고은  아르케에서 경험은 유랑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유랑  저는 10년 동안 지역의 작은 마을에 살았잖아요. 퇴사하면서 수도권에 처음 살게 됐거든요. 그래서 도시에서 1인 청년 가구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있어요. 그런데 아르케에서 이런 연결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게 새롭더라고요.

고은  연결이요?

유랑  아르케 운영 멤버인 하와가 도시에서도 연결을 만드는 시도를 해볼 수 있지 않겠냐고 했는데, 아르케 활동을 하며 진짜 그럴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아르케가 지역 공동체, 마을 공동체에서 느껴지는 연결을 만들려는구나 싶어요.

다양한 클럽을 통해서 각자의 고민을 나눌 수 있는 것도 그런 거죠. 또 체크인, 체크아웃으로 일상을 나누는 것도 진짜 좋은 것 같아요. 저는 일상을 나누는 게 되게 필요하다고 느끼거든요.

고은  지난번에 열렸던 반상회에서 새해맞이 만두 빚기를 했잖아요. 그것도 일상을 나누는 자리였을 것 같아요. 저는 마감 일정이랑 겹쳐서 못 갔는데, 너무 아쉬웠어요.

유랑  재밌었어요! 우선 같이 빚은 만두가 너무 맛있는 거예요. 다 먹은 다음에는 라면을 끓여주셨는데 그것도 맛있어서 행복했어요. 설거지 당번은 게임으로 정하기로 했는데, 다들 엄청 진심이었죠. 운영진들이 그만 해야 한다고 하는데도 다들 도파민에 절여져서 계속하자고, 더 놀자고 했어요. (웃음)

그냥 깔깔대며 놀았던 게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 거기서 느껴지는 배려도 너무 좋았고요. 사소하게 넘어갈 수 있는 지점을 노력으로 인정해 주고 고마워해 주는 분위기가 참 따스했어요.

다음 시즌에 한 달에 한 번씩 저녁 먹는 클럽을 열까 해요. 저는 같이 저녁 먹는 게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도시에서 혼자 살다 보면 잘 안될 때가 있잖아요. 메뉴를 하나씩 가져와서 한 달을 마무리하는 식사 자리를 만들어 보려고요.

고은  아르케에 아쉬운 점이 있거나 운영진에게 바라는 점이 있을까요?

유랑  커뮤니티를 만들기 위해서 에너지와 마음을 쓴다는 게 너무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공동체에 있다 보면 언젠가는 지치고 벅찬 순간이 오잖아요. 그 시점이 오기 전에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갈 수 있는, 순환할 수 있는 커뮤니티가 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래야 도시에 있는 청년들이 오래오래 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요? 도시 안의 새로운 커뮤니티, 지속 가능한 커뮤니티가 됐으면 좋겠어요.